몇 년 전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개봉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방영하던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무작위 인터뷰를 했는데, 질문 내용은 '5.18이 무엇인가'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5.18을 모른다고 답변하거나, 심지어 6.25와 5.18을 혼동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분명 개탄할 상황임에 틀림 없지만, 한편으로는 집단 망각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에 내심 두려웠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시안을 보며, 몇 해 전 우려했던 생각이 단지 기우는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교과부에서 고등학교 국사 과목을 필수에서 선택과목으로 돌리는 교육과정 개정 시안을 발표한 것이다. 이 시안이 추진된다면 역사교육이 전무한 상태로 졸업을 맞게 되는 학생이 나올 수 있다. 역사학계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교과부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들을 단지 '밥그릇 챙기기'로 몰아붙이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역사교육은 그러한 소리(小利)로 폄훼할 대상이 아니다.
역사에 관한 한, 한국은 지금 전쟁중이다. 한홍구 교수의 말마따나 한국은 동북아 주변국가인 중국, 일본과 첨예한 '역사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더불어 국내에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역사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역사교육은 현재 진행중인 역사전쟁을 대비함은 물론, 개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사실과 진실을 연구·교육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과제를 청산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보편적인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성찰과 청산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교육이라는 대의(大義)를 한낱 소리로 폄훼하면서 도외시하는 정부의 시안은 정치적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2010년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한 해가 될 것이다. 굵직했던 사건들이 새로이 기억되겠지만, 국치 100년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식민 잔재의 청산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거멀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사를 밝히고 알리는 것을 대한민국의 정체성 흔들기라며 반대하는 것은 자신이 보수가 아니라 수구임을 자처하는 발언이다.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는 것을 반대하는 이가 어찌 보수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큰 줄기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모든 한국인들은 단 두가지만을 열망하고 있었다. 독립과 민주주의. 실제로는 오직 한 가지만을 원했다. 자유."라고 말한 것에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세상, 이성과 양식, 양심이 살아 숨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도 같은 언저리에 있다.
- 서중석 교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저자 서문' 중에서
김산이 바라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더이상 집단 망각의 시대를 진전시켜서는 안 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자들은 결국 과거를 반복할 운명에 처할 것이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라는 글귀를 남겼다. 집단 망각을 조장하고 방치한다면 반복되기 두려운 식민 지배와 독재의 잔상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것이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교육을 통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만이 집단 망각의 진정한 극복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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